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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주에 오기 전 이야기, 오게 된 이유.

by 달B 2024. 2. 6.

지난 2022년 8월 1일, 나는 혼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왔다. 호주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돈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었다. 가장 솔직하게 말하면, 초등학생 때부터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어.'라고 줄곧 느껴왔기 때문인 것 같다. 이유를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생존불안에 시달렸다. 내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하지 못하면, 버려질 것 같은 그 느낌이 항상 가슴 깊숙이에 있었다. 지금 그 아이를 돌아보면 '겁에 질려 스스로를 채찍질하다가 아파서 우는 모습'이다. 이 채찍질은 20대 중반까지 지속되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난 이게 열정인 줄 알았다. 그 가짜 열정 덕분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공부도 열심히, 운동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뭐든지 멈추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해야만 내 가치가 존속된다는 믿음이 너무나도 강해서 한 치 의심도 없이 나름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원했던 '호주 시골에서의 산책'.

 

 고로, 그 가짜 열정으로 인해,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항상 미묘하지만 분명한 불안감이 있었다. 잠을 편히 못 자는 날들이 많았고, 신경이 곤두서서 무언가 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상태가 지속되었다. '과잉활동증후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엄마가 '너는 언제 자냐? 그렇게 자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안 피곤하냐?'라고 자주 물어보셨다.

 나도 어렴풋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긴 했지만, 과잉활동 상태에서는 그런 것들을 차분히 바라보기 어려웠다. 잠깐이라도 멈춰서 차분히 스스로를 조망할 시간, 현존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필요하다' 는 느낌조차 걸리적거렸다. '스스로 만들어 낸'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기에 그에 대해서 깊이 느껴보려 하지 않았다.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운동이나 더 하자.'라는 마인드였음).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과잉활동에 에너지 넘쳐 보였던 나는 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지쳐있었다. 다만, 나 자신이 지쳐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스스로에 대한 알아차림이 부족했었다.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많은 노력을 퍼부었다. 그렇기에, 끝 없이 스스로를 다독여도, 탈진하는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느낌이 오면, 주저앉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워서 계속 무시하고 더 많이 바깥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결국, 나는 아프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제외한 온몸이 미친 듯이 가렵기 시작했고, 불면증에, 목에선 알 수 없는 이물감이 있었고, 이유 없이 무릎통증과 허리통증이 심해지고, 설사 약을 멈춰도 멈추지 않는 설사가 거의 반년이나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내가 노력하는 것들을 멈추게 되면, 애써 무시하려던 불안감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게 더 무서웠다. 그래서 일부러 더 바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몸을 움직이고, 불편하면 그냥 약을 처방받아서 먹었다. 그렇게 계속 버텨가며 살던 중,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왔다.

 그리고, 팬데믹이 오자 그 모든 상황이 역전되었다. 과잉활동으로 스스로를 마주하기를 거부해오는 것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혼자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탈진하는 느낌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동안 애써왔던 모든 것들, 공부, 운동, 자기계발 등등을 다 내려놓았다. 그저 느껴지는 것을 마주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주의를 돌릴 만한 자극도 찾을 수가 없으니, 온전히 나의 약한 부분을 마주했다. 또, 타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니, 그동안 보지 않으려고 했었던 '간단명료한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음의 진실은 항상 간단했으며, 사실은 내 곁에 있었다.

'나는 요즘 내 모습이 슬프고 힘들어 보인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즐겁지 않고, 버티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속였기에 몸이 아프다.'

'이 사람들, 상황과 나는 맞지 않다. 내 자리가 아님을 직감한다.'

'내 영혼이 기뻐하지 않기에, 내 머리는 논리로써 날 설득하려 한다.'

'진작에 스스로에 대해 바라봤어야 했지만,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 외에도 분명하게 처음부터 내 곁에 있었지만, 나의 '자존심'과 '상처받은 마음들'과, '세상에 나를 증명하려는 마음' 등등 여러가지 에고들이 앞서 부정해 왔었던 이 진실들은 결국 튀어 올라왔다. 이렇게 혼자서 스스로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결국 자연스럽게 이 모든 진실과, 그로 인한 변화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로, 나는 다 내려놓고 싶다는 욕망을 존중했다. 다 멈췄다. 운동도, 학위도, 친구를 만나는 것도 다 그만두었다. 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잤다.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데에 대한 상실감과, 허무감, 외로움,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분노 등의 감정들이 올라올 때마다 그것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충분히 머물렀다.

 두 번째로, 나는 '평온하고 싶고, 근원 또는 본질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 가슴 깊은 욕망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자 오랜 시간 명상하고, 자연 속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는 것으로 시작했다. 평온에 대한 열망은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강해졌고, 나는 소규모 명상센터를 찾아 새벽명상을 하고, 요가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며 내면작업을 해나갔다.

 

 그렇게 1달, 6달, 1년, 2년이 지나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우선, 주변 인간관계가 파격적으로 변화하고, 정리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가 원하고 바란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느껴보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일치하지 않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시작하자, 피부병과 우울증과 불면증은 사라졌으며, 의사가 먹지 말라고 했던 그 모든 음식들을 먹고도 더 건강한 상태가 되었다. 그 당시 얻게 된 답은 이거였다.

 " 몸과 마음과 영혼이 일치하는,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자. 그런데, 지식이나 생각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는 본연의 모습이 어떤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알아차림, 조건 없는 수용,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이런 마음가짐을 먹기까지, 많은 회복의 과정들이 있었다. 화장실 갈 때, 배달음식 1끼 받으러 나갈 때를 빼고는 침대에서 거의 나가지 않으면서 누워만있던 때도 있었다. 그다음은, 하루에 30분 집 근처 산책을 꼬박꼬박 나가고 샤워하기, 그다음은 냉장고 청소, 집청소, 운전면허, 국가자격증 등등. 나는 이런 식으로 천천히 삶에 대한 의욕과 마음의 체력을 천천히 회복했다. 

 

 그렇게 나는 꽤 괜찮아졌지만, 해외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하루하루를 감사와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려, 내 본모습대로 살아가려 애썼지만, 난 이곳에서 여전히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좋고 나쁨,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재단해야만, 알아야만 마음이 편한 사람들이 집약적으로 모여사는 이곳에서, 난 절대 충분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또, 아무리 비교하지 않으려 애써도, 나도 그들과 같이 될 때가 생기는 것도 참 싫었다. 때로는 자신의 절대적인 기준에 맞춰 행복을 느끼더라도, '내가 또 스스로를 속이나? 내가 진짜 행복한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한국이 다 나쁘고, 좋은 점이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왜 한국에서 사는 것이 힘들었는지에 중점을 두어 서술했다).

 

 내게,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족' 이라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스스로를 속이며 고통받는 듯 보였고, 항상 외부의 기준에 맞춰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다. 나는 그를 보며 삶에 환멸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건강한 몸과 마음을 되찾았는지와 상관없이, 만약 계속 이곳에서 억지로 적응하려고 하다 보면, 결국에는 스스로를 끼워 맞추고서도 그 불편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  '나는 행복하다'라고 스스로에게 거짓을 되뇌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애써 되찾은 삶에 대한 의욕을 다시는 쉽게 내어주고 싶지 않았고, 나는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아야만' 했다. 또,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게 아니라, '이미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의심 없이도 내가 정상이라고 느끼고 싶었다. 이러한 것들이 자연스러운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해외에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나지만,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야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기에 자연스럽게 해외 유학을 준비했던 것 같다. 워킹홀리데이나 교환학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교환학생의 경우에는 그 당시 생활비와 월세 혼자 버는 것도 벅찼고, 워킹홀리데이는 아무런 경력이 없이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워서 고려해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나는, 이제 그 어떤 것도 걸릴 것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다가 끝나는 것보다는, 책임질 수 있는 선에서는 내 마음이 가는 데로 해보기로 했다. 이제는 '무서워서 대비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그저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으로 해외에 나가서 살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몇번의 검색 끝에 가장 빠르고, 적은 비용으로 갈 수 있는 호주행을 결심했고, 그 즉시 시간제 일을 구해서 돈을 모았다. 그전에는 시간제 일을 이것저것 비교하면서, 계속 망설이고 찾아보기만 했었는데, 호주에 당장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돈을 모을 동기가 생겼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내 체력과 능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돈을 조금씩 모았다. 사실 무직으로 생활한 지 오래된 상태에서 시간제 일만으로 돈을 모으려니 금방 모을 수는 없었지만, 6개월 동안 250만 원 정도만 모으고, 나머지 300만 원은 빌려서, 총 5000달러의 잔고증명을 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가기 위해서는 2022년 기준으로 통장잔고 5000달러, 한화 480만 원가량의 돈이 필요한데, 나는 이 돈도 없었기 때문에 돈을 빌려서 잔고 증명을 하고, 최소한의 금액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시작했다.) 물론 호주에서 버티려면 택도 없는 돈이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 늦어지면 다시금 동기를 잃게 되고, 모아둔 돈 마저 쓰게 될 까봐 용기를 내어 빠르게 추진했다. 이렇게 나는 호주로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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